♣만여명의 숭고한 죽음, 만인의총♣

by 지리산 posted Jan 1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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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여명의 숭고한 죽음, 만인의총♣

임진왜란에 이어 다시 침략한 왜적과 맞서 싸우다 만여명의 민.관.군이 왜적에게 희생당한 아픔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과 묘역을 만들었는데 바로..,만인의총이라고 합니다.

♣만인의총의 배경은?
1.왜적은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원인을 전라도를 접수하지 못했다고 판단하여 정유재란시에는 전라도를 점령한 후 북진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2.남원성은 호남 곡창지대의 관문이자 서울로 통하는 길목으로 전략적 요청지였답니다.

3.정유재란(1597년)당시 왜군이 남원성의 길을 열어줄것을 제안하였으나 단호히 거절하며 싸움에 임했습니다.

4.당시에 남원성을 지휘한 장군은 명나라의 양원으로 3,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5.조선 군사는 1,000명이었으며 나머지는 민간인들이었지요.

♣당시 우리의 각오는 어땠을까요?
적의 군사 5명이 남원성의 총지휘관 양원을 뵙기를 청하자 양원은 관원들의 숙소인 용성관으로 불러 적장의 전황을 들은 후 

"내가 천하를 횡행하여서 이기지 않은 전쟁이 없다"는 말과 당당한 기세를 보이자 적의 병사는 남문을 통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2.왜적이 성밑을 포위한 가운데 전라병사 이복남은 부하장수와 장사 50여기와 수백명의 병력만을 같추고 당당하게 "물러가라"를 외치며 남문으로 들어가는 병사행차를 시행하면서 전투의지를 다짐하였다고 합니다.

♣남원성의 전투는 어떠했을까요?
1.정유년 8월16일, 17일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어요.

2.남원성을 에워싼 왜적의 수는 5만6천여명의 대군이었지요

3.희생당한 민.관.군의 수는 일만여명이었습니다.

4.왜적의 파괴가 극심하여 성안에 민가17가구만이 남았습니다.

5.아군의 희생으로 전투가 끝날무렵 명나라 장수 양원은 수하군사50여명과 함께 도주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군사1천여명과 민간인 6,000여명, 명나라군사 3,000여명은 끝까지 싸우다 순절을 하였지요.

후에 양원은 참형을 당하고 수급이 순시되었다고 합니다.

5.정유재란이 끝난후 순절한 분들을 한곳에 묻고 사당을 지었습니다.

6.광해군이 사당을 충렬사로 이름지었습니다.

♣제향행사를 합니다
1.조선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항전하다 순절한 민.관.군 만인의사의 호국정신의 위업을 선양하고 충절의 혼을 기리기 위해서 제향행사를 거행합니다.

2.매년 9월 26일 15:00에 행사를 합니다.


3.사적지 27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만인의총의 관람은?
1.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에요
2.요금은 무료이며 주차도 무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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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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