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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는 이성계장군이 고려말에 이땅에 침범한..,

일본의 패배를 모르는 괴력의 소년장수 아지발도를 부하장수 이지란과 함께 투구를 맞추어 얼굴이 들어나자 화살을 쏘아서 무찌른 이야기며,

패퇴하여 물러나는 왜군이 분풀이로 천왕봉의 성모상을 칼로 훼손한 이야기며,

9세기중엽에 4,000근의 쇠를 이용해 불상을 만들어서 일본으로 가는 기운을 막고자 했던 실상사 약사전에 모셔져 있는 철불좌상 등..,

수많은 전설들이 있고..,

7,000여종에 달하는 동식물의 자원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지리산에는 참으로 가슴아픈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지리산뿐만 아니라 이나라 곳곳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가슴아픈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소설가 표성흠선생님과 함께 답사하여..,

우리에게 스며있는 아픔의 현장을 살펴보고 영령들을 위로하며 이땅에 다시는 이러한 슬픔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로새기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6.25를 맞아 지리산에는 패퇴하는 북한군이 지리산에 숨어들고 이를 퇴치하려는 국군들과의 싸움에서 이땅의 국민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공비소탕작전인 "견벽청야" 작전으로 전 지역을 초토화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견벽청야"란 지킬곳은 벽을 쌓듯이 확실히 지키고 포기할곳은 적에게 빈들판을 넘겨준다는 의미의 작전을 말합니다.

 

국군 11사단 9연대장 오익경대령은 "견벽청야"작전을 내리면서 지역내의 이적행위를 하는 자는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9연대의 1대대는 함양에서 산청으로, 2대대는 하동에서 산청으로, 3대대는 거창에서 산청으로 이동하는 명령을 받습니다.

 

3대대의 대대장은 한동석소령이었는데, 거창군 신원면을 살피던 한동석은 무장공비가 없다는 보고를 하자 오익경 연대장으로부터 무장공비가 없다느느게 말이 되는냐며, 책임을 질 것이라는 질책을 듣고 신원면으로 되돌아가서 청연마을에 이르러 양민들을 무장공비와 내통했다는 죄목을 씌우게 됩니다.

 

1951년 2월 9일에서 11일사이에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해 덕산리 청연골에서 주민84명, 대현리 탄량골에서 주민100명, 과정리 박산골에서 주민 517명, 기타 지역에서 주민 18명을 합하여 719명의 주민이 학살된 사건입니다.

 

그 중에서 박산골사건은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 주민 800여면을 신원초등학교에 감금하고 군인, 경찰, 방위대가족을 제외시킨 517명을 박산골에 끌어넣고 총으로 학살을 하여 나무로 덮고 기름을 뿌려 태워버린 만행이 자행되었습니다.

 

적군을 퇴치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받은 연대장이 지역을 살폈으나 적군은 보이지 않기에 퇴각을 하는데..,

연대장의 전과가 없으면 책임을 묻는다는 말에 대대장은 전과를 만들고자 주민들을 무장공비와 내통했다는 죄를 만들어 학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군에 알려졌으며, 거창의 국회의원인 신중목의원이 제의하여 국회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현지조사를 위해 파견하였으나 군은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김종원대령을 주축으로 하여 무장공비로 위장하여 국회진상조사단에게 위협사격을 하여 진상조사단이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천행으로 살아남은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군이 계엄령을 선포하여 현장검증을 못하게 막아 3년여를 방치하게 되었습니다.

 

3년이 지난 1954년 4월5일에서 7일사이 박산계곡에 방치된 시신들을 수습하나 오랜기간의 방치로 신원파악이 안되어 큰유골, 중간유골, 작은유골을 분류하여 남자지묘, 여자지묘, 소아지묘로 합동묘역을 조성하였습니다.

 

그 후 변영채 신원면장과 김희주 면의회 의장이 신도성 경남지사에게 진정을 하여 1960년11월18일 위령비를 제막하였습니다.

그러나 5.16으로 정권을 잡은 군에 의해 유족회간부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여 구속이 되고 새로 부임한 최갑종 경상남도지사에 의해 개장명령을 내려 거주지공동묘지로 이장하라하여 유족들의 유골을 찾아달라는 요구에 뼈가루가 섞인 흙으로 분배를 하고 위령비를 철거하여 비문을 정으로 쪼아 땅속에 묻어 버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1967년8월20일 파헤처진 묘역의 복구를 하고 1988년2월15일 땅속에 묻힌 위령비도 파내어 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에 의해 추모공원사업이 추진되어

총 부지면적 49,133평 규모의 합동위령사업을 1998년에 착공하여 2004년10월에 준공되어 아픈역사를 기억하고 다시는 이러한 슬픔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교훈의 장으로 활용이 되고 있습니다.

 

거창사건은 6.25당시에 지리산지역에서 발생한 함양, 산청지역의 양민학살사건의 시작이 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후로 함양을 거쳐 산청지역으로 이어진 사건들이 발생한것입니다.

 

지리산에서 일어난 양민학살사건을 알려면 이 거창사건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이사건을 일으킨 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은 직위에서 해임되고, 연대장 오익경대령은 무기징역형, 학살책임자 한동석소령은 징역10년형,

이 사건을 은페하기 위해 국회진상조사단을 위협사격한 김종원대령은 징역3년형을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년의 형도 채우지 않은채  

대통령특사로 풀려나서 공직에 복귀하였다고 합니다.

 

<거창사건추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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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진행을 조각으로 형상화 한 내용입니다. 밭을 갈던 평화로운 지리산마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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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의 국내대부분 장악으로 인해 무장공비들이 나타납니다. 이는 이곳 지리산뿐이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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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공비가 나타나서 활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군에 의해 지역초토화작전인 "견벽청야"작전이 개시되어 양민이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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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국회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가 시작되지만  무장공비로 위장한 반대파에 의해 무산되어 세월이 흐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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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거창사건명예회복 특별조치법"에 의해 2004년10월에 추모공원이 조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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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를 맡은 소설가 표성흠선생님이세요. 거창사건추모공원의 기초를 설계하고 시로 새겨 아픔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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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공원에 안치된 분들의 위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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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들의 사죄하는 조각상입니다. 이런 아픔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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